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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하루키 - 스푸트니크의 연인 도입부 스물두 살의 봄, 스미레는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처럼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땅 위의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남김없이 짓밟고, 모조리 하늘로 휘감아올리며 아무 목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고 철저하게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고삐를 추호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가련한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어 어느 곳엔가 있는 이국적인 성곽 도시를 모래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그것은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 2018. 11. 19.
무라카미하루키 - 1Q84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택시 라디오에서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 정체에 말려든 택시 안에서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랄 수는 없었다. 운전기사도 딱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년의 운전기사는 마치 뱃머리에 서서 불길한 물때를 읽어내는 노련한 어부처럼 앞쪽에 끊임없이 늘어선 자동차 행렬을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오마메는 뒷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가볍게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었다. 야나체크의 첫 부분을 듣고 이건 야나체크의 라고 알아맞힐 사람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아주 적다'와 '거의 없다'의 중간쯤이 아닐까. 하지만 아오마메메는 왠지 그걸 맞힐 수 있었다. 야나체크는 1926년에 이 작은 교향곡을 작곡했다. 도입부의 테마는 원래 한 스포츠대회를 .. 2018. 11. 12.
무라카미하루키 - 크리스마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테레오 오디오를 선물 받았을 때,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캐럴 레코드가 함께 딸려왔다. 그런 걸 보면 크리스마스 즈음의 계절이었나보다. 여름에 산 오디오에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레코드가 딸려올 리 없으니 말이죠. 레코드는 네 곡이 수록된 콤팩트 판으로 와 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만 있으면 꽤 멋진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다. 하기야 벌써 이십몇 년이나 지난 옛날이니까. 크리스마스캐럴이라야 네곡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것도 빙 크로즈비가 부르는걸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1960년 12월. 우리는 아주 심플하고, 아주 행복하고, 아주 중산계급다웠다. 그리고 빙 크로즈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를 불렀다. 코끼리 공장의.. 2018. 11. 9.
무라카미하루키 - 굿 하우스 키핑 결혼하고 이 년째쯤 되던 해의 일인데, 나는 한 반 년 정도 '주부(하우스 허즈번드)' 역할을 했더랬다. 그때는 이렇다 할 느낌도 없이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 반 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시절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긴 그 당시엔 딱히 '주부'가 되고자 소망한 것도 아니고, 우연찮은 사소한 인연으로 마누라는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고, 내가 집에 남아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렇저럭 벌써 십이삼 년, 존 레논이 '주부'가 된 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전의 일이다. '주부'의 일상은 '주부'의 일상과 다를바 없이 평온하다. 우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마누라를 일터로 보내고 뒷정리를 한다. 싱크대 속에 있는 그릇들을 재빨리 씻어 놓는 것은 물.. 2018. 11. 8.
무라카미하루키 - 소문! 소문이란 그 나름으로 무척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교우 관계가 폭넓은 편이 아니라서 - 잘라 말하면 좁다 - 그런 일이 흔치 않지만, 그래도 가끔 나와는 전혀 무관한 나에 대한 소문이 귀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 고맙게도 지금껏 그다지 나쁜 소문은 없고, '무라카미가 BMW를 산 것 같던데'라든가(살 턱이 없잖아!), "무라카미는 튀근 두부를 하루에 세 모나 먹는대'라든가 (한모밖에 안먹는다) 하는 정도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째서 내가 튀긴 두부를 하루에 세 모나 먹지 않으면 안된답니까?'하고 상대방에게 물어 봤더니, '하 참, 잡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란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인터뷰의 질문은 지겨워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잡이 대답을 하는 경우.. 2018. 11. 7.
무라카미하루키 - 철학으로서의 온더록스 그 무렵 외원 예문 몇 가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머싯 몸의 '모든 면도기에는 철학이 있다'란 구절. 앞뒤로 꽤 긴문장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잊었다. 요컨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보면 절로 철학이 생겨난다는 뜻이다.여자식으로 변형하면 '모든 립스틱에는 철학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몸의 이 문장을 읽고 '으음,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하고 꽤나 순진하게 감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바의 카운터에서 일하는 동안에도,'모든 온더록스에는 철학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팔 년간 매일 온더록스를 만들었다.그런데 정말 온더록스에 철학이 있을까. 그야 당연히 있다. 물론 세상에는 맛있는 온더록스와 맛없는 온더록스가 있을 텐데, 맛있는 온더록스에는 확실한 철학이 있다... 2018. 11. 6.
무라카미하루키 - 일기, 혹은 그런 류에 대하여 나는 애당초 편지를 위시한 등등의 글 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스물아홉 살이 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글이라곤 거의 써 본 일이 없지만, 일기만은 불현듯 생각나면 단속적으로 썼다. 반 달쯤 쓰고는 넉 달을 쉬고, 석 달을 쓰고는 또 두 달을 쉬는 그런 리듬으로, 그런 게 지금까지 토막토막 이어지고 있다. 하기사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일기'가 아니라, '일지'이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남, 날씨, 무얼 먹음, 누굴 만남, 얼마만큼 일을 했음 하는 사실을 메모하는 것뿐으로, 그 이상의 것은 전혀 안 쓴다. 심리 묘사라든가, 창작을 위한 노트라든가, 사회적 사건에 대한 성찰이라든가 하는 종류의 것은 백 퍼센트 없다. 그러니까 사후 일기가 발견된다 해도 출판되는 가능성은 전무할 것이다... 2018. 11. 5.
무라카미 하루키 - 레스토랑에서 책 읽기 시내에서 문득 책이 읽고 싶어질 때는 오후의 레스토랑이 최고다. 조용하고, 밝고, 한적하고, 푹신한 의자가 있는 레스토랑을 한 군데 확보해둔다. 와인과 가벼운 전체만 주문해도 점원이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친절한 곳이 좋다.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이 남으면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들고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 화이트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면 아주 호사스럽고 한가로운 기분이 든다. 체홉 같은 작가의 책을 읽으면 무척 조화로운 풍경이 될 것 같다. 생활 속의 이런 소소한 요령은 누가 일부러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정보지에 실려 있지도 않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도쿄에 사나 그린란드의 설원에 사나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코끼리공장의 해.. 2018. 11. 3.
무라카미하루키 - 셰이빙크림 이야기 그런 식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후로는 온종일 셰이빙 크림을 들고 거리를 어슬렁거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셰이빙 크림을 한 손에 들고 걷다보면 거리가 여느 때와 좀 다르게 보인다. 권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걸으면 거리가 여느 때와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셰이빙 크림 하나로도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바에 들어가 카운터 위에다 셰이빙 크림이 든 봉투를 슬명시 올려놓고 위스키를 즐기는 것도 상당히 멋스럽다. 그게 어디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외국에 나가면 제일 먼저 그 지역 슈퍼마켓에 뛰어들어가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욕실 선반에 면도기와 칫솔과 함께 나란히 늘어놓는다. 그러면.. 2018. 11. 2.
무라카미하루키 - 건강에 대하여 '첫째가 건강, 둘째는 재능'이 나의 좌우명이다. 조만간 안자이미즈마루 화백에게 그렇게 써 달라고 하여 족자를 만들어 도코노마에 걸어 두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다. 글자 밑에 쇠로 된 아령 그림 같은 게 들어 있다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한다. 어째서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가 재능'인가 하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건강이 재능을 환기시키는 일은 있어도, 재능이 건강을 환기시킬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하기만 하면 재능이 졸졸 따라온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노력이나 집중력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체력이 필요하고, 노력이나 집중력을 유지함으로써 재능을 중식시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그래서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는 재능'인 것이다.하기야 이런 사고.. 2018.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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